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문단 편집) ==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 == 그러나 6시 28분, 히틀러가 자신의 생존을 알리며 음모자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하겠다는 라디오 연설을 발표하자 쿠데타 세력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발키리 작전의 발동과 히틀러의 생존이라는 정보와 지령들이 쏟아지면서 병력들의 혼란이 심했던 판에 상황이 더 악화된 것이다. 물론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서는 라디오 연설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전군에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알렸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의 장교들이 이탈하여 결국 암살기도와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특히 쿠데타 세력의 유일한 정예부대이던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대대장|장]] [[오토 에른스트 레머]](Otto-Ernst Remer) 보병[[소령]][* 레머는 수많은 원수가 있던 독일군에서 겨우 소령 계급이었지만 곡엽기사철십자장에 대독일십자훈장 금장, 전상장 금장, 보병 돌격장, 백병전 기장 은장 등을 수훈한 전쟁 영웅이었다. 괜히 독일 국방군 육군중에서도 최정예 중 하나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 지휘관이 아니었던 것이다. 히틀러 암살 사건 이후에는 대령 특진 등 초고속으로 진급해 소장까지 갔다. 다만 대대장까진 꽤 능력을 발휘했지만, 이후엔 역량의 한계가 왔는지 연대장 이후부턴 무능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이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잡으러 갔다가 히틀러와 직접 통화한 후 히틀러 편으로 돌아선 것이 결정타였다. 오후 10시경에는 쿠데타에 가담했던 장교 10여명이 배신을 했고, 총격전 끝에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쿠데타측의 장교들이 체포되었다. 감금되어 있던 [[프리드리히 프롬|프롬]] 장군도 풀려났고, 곧이어 프롬은 자신이 쿠데타 세력과 접촉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2시간 뒤인 자정에 긴급 군법회의를 소집하여 베크 장군에게는 자살을 요구하고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등에게 [[사형]]을 언도하여 예비군 사령부 뜰 내에서 그들을 총살시켰다. 총살은 [[군번]]순으로 집행됐기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다음으로 헤프텐 중위가 마지막으로 죽을 예정이었으나, 대령이 총살될 때 그를 몸으로 막기 위해 사선으로 뛰어들며 대령과 동시에 사살당했다. 그러나 육군상급대장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 장군만은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2시 30분, [[오토 슈코르체니]] SS[[중령]]이 현장에 들이닥쳐 아직 살아 있었던 회프너, 비츨레벤, 프롬 등을 체포했다. 한편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에서도 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의 일원인 카를 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Carl-Heinrich von Stülpnagel) 육군대장이 파리의 SS와 게슈타포들을 체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파리에 있던 서부전선 해군 사령관 해군대장 테오도르 크란케(Theodor Krancke) 제독이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예하의 해군 병력 1천여명을 [[해군 육전대|육전대]]로 동원하겠다며 대치했고, 보다못한 주 파리 대사의 중재로 슈튈프나겔 장군은 반란을 포기했다. 슈튈프나겔 장군은 "오해였다."며 상황을 무마한 뒤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해군과 SS 지휘관들과 [[건배]]를 하며 훈훈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그 뒤 슈튈프나겔 장군은 베를린에서의 거사 실패 소식을 접하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이후 체포되어 8월 30일에 처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